조선의 명문가에서 여섯 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의 임무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강제 편입되자
형제는 독립운동에 동찹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국내에서 하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낀 형제들은
대대로 내려온 집과 땅을 포함한 엄청난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만주로 망명한 형제는
좀 더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학교 출신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1945년,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주로 떠나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여섯 형제 중
살아남아 조국 땅을 밟은 건 오로지 다섯째 이시영 선생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빚진 여섯 형제분의 이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중국의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병사하셨습니다.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1934)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보냈지만, 중국 빈민가를 전전하다가 결국 아사하셨습니다.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했습니다.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독립운동을 하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임시 정부 재무총장직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하셨습니다.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
만주, 북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3년 소식이 끊기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여섯 형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
- 우당 이회영-
이 글은 따뜻한 하루에서 제공되는 제 메일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하트공감버튼 꾸욱~ 눌러주세요!
소통하는 댓글도 좋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 따뜻한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하루 - 명언] 사랑이 물든 손 (2) | 2016.12.05 |
---|---|
[따뜻한 하루 - 명언] 친구의 눈, 친구의 발 (0) | 2016.12.01 |
[따뜻한 하루 - 명언] -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0) | 2016.11.29 |
[따뜻한 하루 - 명언] 모두의 기적 (0) | 2016.11.28 |
[따뜻한 하루-명언] 대통령의 양심 (0) | 2016.11.27 |